팥양갱 산문
열린 문과 발코니 사이에서 부는 바람
가랑비메이커
작업실 테이블 위치를 바꾸었다. 모든 게 멈춘 듯한 공간이 안정을 넘어 권태로워질 때나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지켜오고 있는 작은 변화다. 발코니를 등지고 문을 마주 보았던 테이블을 90도 회전시키니 모든 게 나란해졌다. 조금만 시선을 옮겨도 열린 문을 통해 건너편 복도에 엎드려 잠든 나의 늙은 개를 볼 수 있다. 오후가 되면 발코니 창 너머로 하교를 마친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다니며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열어둔 문과 창 사이로 불어오는 아침 맞바람이 제법 서늘해졌다. 전기 포트에 끓인 물을 둥근 머그잔에 붓고 그 안에서 천천히 퍼지는 초록 물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로 가을을 실감한다. 게을러지는 마음을 등받이와 함께 당겨 테이블에 앉는다. 터질 듯한 메일함에서 급한 메일을 속아내고 급한 택배들을 부치고 나면 오후가 도착한다.
제 나이를 잊고 어린 개처럼 펄쩍 뛰며 놀아 달라는 나의 늙은 개의 채근거림과 이제 막 학교라는 울타리에 들어선 어린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이 교차하는 동안 문득,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나에게 있어 살아 있다는 것은 맥박이 뛰고 신체 활동이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어진 삶에 대한 숙제를 성실히 해내고 있는가에 대한 사고를 멈추지 않는 것. 어제보다 오늘 더 해답에 가까워지기 위해 마음껏 헤매고, 엎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것. 내게 살아 있다는 것은 작은 반추와 새로운 자국을 새기는 일이라, 종종 나는 내가 죽음에 머물러 있다고 느낀다. 사람들과 만나 주체적으로 분위기를 이끌고, 누군가를 웃게 하고 울게 하기도 하지만, 나를 감동시켜 본 적이 언제였는가 생각해 보면 마음이 흐려진다. 지난 계절을 건너 건너 수많은 챕터 속을 헤집어도, 생의 환희가 머물던 순간은 손에 꼽힌다.
기쁨과 환희, 슬픔과 애통……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깊이와 원천이 다르다는 걸 몰랐더라면 어땠을까. 먹고 마시는 일로 배부르게 살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기쁨을 쫓고 슬픔을 피하는 일만을 삶의 방향으로 정했더라면, 머리를 베개에 누이면 쏟아지는 게 단잠뿐일 수 있었을까. 장난감을 곁에 두고 잠든 개의 등이 작게 오르고 내리는 모양을 보다 괜히 이름을 불러 깨우고 싶은 작은 심술을 삼키는 오후. 답이 없는 물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
“야, 야, 안녕이라니까! 안녕이라고!”
열어 둔 발코니 창 너머로 남자아이 하나가 소리친다. 대답이 없는지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반복하던 안녕이라는 말. 부끄러움도 민망함도 없이 번져 나가는 안녕이라는 말에 밖을 내다봤다. 한 발을 자전거에 걸치고 다른 한 발은 땅을 짚고 서 있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아주 먼 곳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저 멀리 작은 점처럼 보이는 아이가 제 친구인 줄은 어떻게 알고 인사를 건네는 걸까.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기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는데, 가려던 길을 멈추고 줄기차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 안녀어어엉.
발코니에 서서 몰래 그들을 바라봤다. 작은 점이 작은 남자아이가 될 때까지, 마침내 목이 다 쉬어버린 아이에게 안녕, 이라는 인사가 돌아올 때까지. 나란히 서서 한참을 나누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다만 살아 있다는 것이 꼭 무겁고 복잡한 숙제 같은 의미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추신
저마다 가을을 실감하는 시간을 다르겠지만요. 낮에 울던 매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밤마다 귀뚜라미가 우는 것을 보니 가을이 도착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아요. 저에게 있어 가을의 또 다른 신호는 삶에 대한 지나친 사색입니다. 어제는 살아 있다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는 일만이 오후의 일과였고 오늘은 그 고민을 글로 풀어내는 것이 저녁의 일과가 되었습니다. 답이 없는 물음이 자꾸 늘어가는 가을이지만 뜻밖의 해답 얻기도 하는 계절이기도 하네요.
겨우 두 마디의 인사를 건네기 위해 느린 걸음을 기다리는 일도 결국 살아 있기에 가는 한 일이 아닌지. 저는 조금 더 저를 기다려 보기로 했어요. 조금만 지나면 지나친 사색도 조바심도 명랑하게 지나가 버릴 테니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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