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영화
— 영화, 어떠셨어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상영관을 빠져나오며 조심스레 물었다. 존 카니의 「원스」와 「비긴 어게인」을 재밌게 보았다는 그였기에, 극장 재개봉한 「싱 스트리트」 또한 그의 취향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그나저나 강남역 한복판의 씨지브이에 온 게 얼마 만이더라. 대학생 시절 옛 애인(사귀기 전이었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를 안 본 척하고 며칠 사이 같은 영화를 연달아 본 기억이 스쳤다. 그때의 나는 영화를 보다가 용기 내어 손을 잡았는데, 그런 판타지 액션 영화에서도 로맨스를 느낄 구석이 있다는 것에 조금은 신기해하기도 했다. 영화관은 그런 공간이다. 한 시절의 설렘과 낭만이 깃들어 있는 곳. 떠올려보면 누군가와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본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 음… 제 스타일은 아니었어요.한참 입안에서 단어를 찾던 그는 말을 이었다.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영화가 썩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 어? 정말요…?
좁은 에스컬레이터를 일렬로 타고 내려오며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지나갔다.
— 언제 좋은 노래가 나오나 했어요.
내용도 내용이지만 로큰롤이나 밴드 음악에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록과 팝, 발라드와 댄스곡이 적절히 섞인 훌륭한 오리지널 스코어라고 생각했는데.
“밴드 음악 정말 좋지 않았나요?” “형 브랜든의 대사 참 감동적이지 않나요?” “라피나를 생각하며 적은 가사가 참 애절하지 않았어요?” 압박 면접을 하듯 캐묻고 싶었지만, 영화에서 느끼는 감상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므로 나의 기호를 과하게 설득할 수는 없었다. 간혹 이런 말들은 취향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좋다’라는 것도 나만의 느낌일 뿐이지 않은가.
우리는 카페로 자리를 옮겨 영화 이야기를 이어 나가다 문득 그의 영화 평점이 궁금해졌다. 가끔은 영화를 이루는 요소를 파헤치고 속속들이 따져보는 것보다 명료한 숫자로 영화를 평가하는 편이 간단하니까.
그는 이 영화의 평점을 2.5점이라 하였다. 4.5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준 나는 그 평점이 내심 아쉬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 영화는 아닌데… 싶었던 것이다. 내가 만든 영화도 아닌데 왜 그런 실망감을 느끼는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어서 같은 평점의 영화 제목을 읊어주었는데, 범작의 경우 5점 만점의 절반인 2.5점을 주는 듯했다. 그에게 「싱 스트리트」는 내가 3점을 준 영화와 유사했던 셈이다.
왓챠피디아 앱을 살펴보는 그에게 평점 높은 순으로 영화 목록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영화를 보고 평점을 매기기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그는 나와 비슷한 수의 영화를 평가했는데도, 나보다 많은 작품에 만점을 주었다. 마음이 동하는 영화에는 후한 점수를 주는 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가장 아끼는 음악 영화인 「싱 스트리트」는 2.5점이라니. 아무래도 아쉬운 마음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아끼는 영화를 함께 좋아해 주길 바랐던 것은 영화 취향을 인정받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 작품에 위로받았던 과거의 나를 이해받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꼭 영화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경우가 종종 있다. 누군가에게 음악이나 책, 코미디 영상 클립 같은 것을 추천했을 때 내가 좋아하는 만큼의 반응이 돌아오지 않으면 못내 아쉽고, 때로는 서운하기까지 했다. ‘나랑 취향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네?’라는 알량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이 좋아하는 영화라 해서 모든 사람에게 가닿는 것은 아니다. 나만 해도 그런 것이 그가 좋아한다고 했던 같은 감독의 다른 음악 영화들을 재밌게 보긴 했으나,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영화의 배경지와 대표곡의 멜로디 정도뿐이었으니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영화의 OST를 차례로 들으며 곰곰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시시한 성장 이야기로 보이는 이 영화가 나는 왜 이토록 좋은 걸까. 어떤 마음으로 수백 번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들은 걸까. 아무래도 20대 시절의 나에게 용기를 건네준 영화였기 때문일 것이다.
*
영화는 주인공 코너가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가며 시작한다. 하굣길 학교 앞에서 마주한 라피나에게 한눈에 반한 코너는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좌충우돌 밴드를 결성하고, 음악을 통해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는 식의 이야기다.
부모의 이혼, 불안한 미래, 첫사랑 앞에서 흔들리는 코너 곁에는 그를 늘 지지해 주는 존재들이 있다. 형 브렌든은 뼈 있는 조언을 아끼지 않고, 친구 에이먼은 자신의 재능을 살려 코너와 곡을 함께 만든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코너를 성장시키는 인물은 라피나이다. 뮤직비디오를 찍던 중 작품을 위해 주저하지 않고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라피나를 본 그는 동네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많은 생각에 잠긴다.
이후로 코너는 그녀를 위한 가사를 쓰고 노래를 만든다. 당연하게도 누군가를 생각하며 만들어낸 것에는 자연스레 진심이 스며든다. 이를테면 편지 속 문장이나 향긋한 드립 커피 한 잔 같은 것들. 그 안에는 뭉근한 온기와 은근한 향이 담겨 있다. 지난날 펴낸 책을 들춰보았을 때, 다시 읽어도 웃음이 지어지는 글은 대개 어떤 한 사람을 떠올리며 써 내려간 글이었다. 비록 그것을 읽는 사람은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쓴 사람은 분명히 알고 있다. 아마도 그 시절의 나는 그런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무언가를 시작하게 만들고, 정처 없이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 줄 누군가가.
이제 와 뒤돌아보면 그때는 무엇이든 할 수 있던 시절이었겠지만, 제대로 갖춘 것 없이 대학을 막 졸업한 시기의 나는 몸과 마음이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무얼 해도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고, 회사에서도 친구들 앞에서도 주눅 든 마음에 내 의견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나를 억누르는 것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시기에 만난 영화가 바로 「싱 스트리트」였다. 훔친 듯이 달릴 수도, 실제로 무언가를 훔치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학교 강당을 배경으로 한 뮤직비디오 제작 중, 오지 않는 라피나를 기다리며 마지못해 촬영을 시작하는 순간이다. 연주가 흐르면 코너는 행복한 상상에 잠기는데, 기다리던 라피나가 드레스를 차려입고서 나타난다. 자신을 괴롭히던 선생님은 흥겹게 무대를 즐기고, 이혼한 부모님은 다정하게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좀처럼 집 밖을 나서지 않던 형은 머리를 자르고 오토바이를 타고 멋지게 등장한다.
하지만 노래가 끝나면 공상 속 장면들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굳게 닫힌 강당 문은 열리지 않고 그녀 또한 오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기다리는 것이 오지 않더라도 노래를 시작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눈앞에 펼쳐진 장면들이 아무리 달콤해도 결국 그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을 영화는 고스란히 보여준다.
특정한 시기에 나를 바꿀 만한 영화를 만나는 것은 우연한 기적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그때마다 마음을 기울이는 가치 또한 달라진다. 한때 나는 불같은 열정을 갈망했고, 적당히를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성정상 그러지 못한 사람이어서인지 영화 속에서 반복되던 비슷한 결의 대사들이 유독 가슴 깊이 남아 있다.
— 로큰롤엔 위험이 따라. 조롱당할 수 있는 위험.
— 지금 가지 않으면 절대 못 가니까, 지금 알지 못하면 절대 모르니까.
열정이 식어버린 지금의 내가 처음 이런 대사를 접했다면, 당연한 말을 하고 있네, 하며 심드렁하게 넘겼을지도 모른다. 너무 친절하고 교훈적인 말들은 어쩐지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니까.
하지만 어떤 시기에는 뻔하고 진부한 말이 도리어 힘이 된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만 같은 순간이 삶에는 찾아오기 마련인데, 그럴 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거대한 외부의 힘이 아니라, 곁에서 건네는 소박한 응원과 따스한 시선이다.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다소 쉬운 길을 택했다는 걸 머리로는 안다. 그런데도 가슴은 말한다. 그래서 뭐? 지금 나한테는 이런 말이 필요했고, 그것으로 삶을 바꿀 용기를 얻었으면 된 거 아니야?
같은 영화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명작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평작이 된다면, 이런 자문을 하게 된다. 과연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
한 사람의 시절 속으로 들어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영화. 어쩌면 그런 영화가 좋은 영화가 아닐까. 작품 자체의 완성도가 뛰어나 오래 남는 영화도 있겠지만, 대개는 어떤 사람, 어떤 시절, 어떤 순간과 맞물린 영화가 비로소 나의 영화가 된다. 영화라는 매체에는 숙명적인 시차가 존재한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간과 관객이 영화를 만나는 시간이 다르고, 그것을 마주하는 관객의 시간 또한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나란히 앉아 같은 영화를 본 우리 사이에 생긴 2점이란 간극 역시, 서로 다른 10년의 시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내가 「싱 스트리트」를 보는 동안 옆 사람 몰래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던 것은, 익숙한 전주에 소심하게 고개를 까딱거리고 발을 굴렸던 것은 아마도 나의 지난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 나를 살게 했던 사람. 한때 나를 견디게 했던 영화. 시절 인연이라는 말처럼 그런 영화를 시절 영화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앞으로 누군가와 영화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면 인생 영화가 무엇인지 묻기보다, 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 당신의 시절 영화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