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룰 수 있는 시간
겨우내 준비한 일이 끝났을 무렵만 해도 거리는 연두와 풀색 사이를 맴돌았다. 집 근처 공원의 나무는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았다. 아이폰 사진첩은 성실하게 내 삶을 복습한다. 때맞춰 언젠가의 오늘에 대해, 그때의 나에 대해 알림하곤 한다. 오래된 사진들을 들춰보다가 일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3년 차. 집 근처 공원은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지만 유독 여름에만 감탄할 수 있는 장면이 있다. 꼭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하고 자란 걸까 싶은 가로수. 서로를 향해 손을 뻗고 뻗으며 자란 나무들이 산책길을 따라 짙은 울창함을 자랑한다. 내가 모르는 세월 간 자연스레 이런 식으로 자란 걸까. 누군가 이미 그러기로 한 나무들을 옮겨 와 부러 그런 식으로 심었으려나. 밤하늘을 가릴 만큼 빼곡하게 맞닿으려면 아직 한 달 정도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았다.
낮에는 제법 볕이 뜨거워졌고 밤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산책은 주로 밤에 이루어진다. 비집고 넘치는 생각을 위해 온전히 낼 수 있는 여유에는 약간의 간절함이 배어있다. 나서야만 이룰 수 있는 시간에 가깝다. 공원의 가로수는 컴컴한 밤에도 그늘이 되어준다. 아무도 몰래 울어도 괜찮다. 마음 담아 꽉꽉 채워준 이들의 손 글씨를 바라보다가 자꾸만 가라앉는 몸을 추스르고 일으켰다. 이처럼 무기력을 반복하고 쓸모와 이유를 파고들면서도 여름을 기다린다. 아무리 따갑고 따가워봐라. 저 가로수 아래에서 걷는 것만큼은 포기하지 않을 테다.
“내가 죽을까 봐 그래요?”
손을 잡고 걷자 말했다. 사랑한다는 말에 인색하게 굴다가도 이따금 저절로 사랑한다 떠들기도 하면서 살아내자 말한다. 잘 지내보자 말한다. 건네는 말이지만 손가락을 떠나면 멀리 오래 허공을 떠돌다 나에게 돌아오는 말이 된다 믿기도 해서, 꼭 말하고 싶은 순간은 어쩌면 꼭 듣고 싶은 순간이기도 해서. 미루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미루지 않고 말하게 된다. 그렇게 손을 잡고 우리는 우리가 나눈 마음을 천장 삼아 집을 짓고 글을 쓰고 무언가 만들고 삶을 가꾸어보자. 살아가 보자. 그늘을 만들어보자.
벚꽃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지나간 탓일까. 오월 끝자락, 여름을 앞두고 분주한 마음과 달리 어떤 감각은 아직 봄에 머물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깊게 챙기지 못한 겨를과 놓고 가야 할 기억은 손바닥을 한껏 펼쳐 놓아주기로 한다. 여름 속으로 걸어갈 채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