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한 애정
오종길
“아프지 마”
면역력이 떨어지자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런 나이가 된 것이다. 이제 내게 봄은 생동의 계절이자, 질병과 함께해야 하는 계절이다.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보내온 문자를 오래 보았다. 단 네 글자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이란 이토록 출렁인다. 오히려 간결해서, 단호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 우리에겐 가끔 단호한 한마디, 그런 무언가가 필요하다.
주말에는 해방촌 오랑오랑에서 열린 <도서유람단>에 참여했다. 도서유람단은 전국의 책방이 일 년에 하루 모이는 행사로, 8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서울에서 개최했다. 시절은 스토리지북앤필름 마이크 사장님의 배려로 참여할 수 있었는데, 유람단원 하나하나가 너무 다정해서 눈물이 왈칵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만난 사장님들이 서로 안아주고 따스한 눈빛을 주고받는 장면들을 보고 있자니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하는 노랫말이 절로 흘러나오는 듯도 했다. 11주년을 맞이한 제주 라바북스부터 영업을 종료하였음에도 함께하기 위해 시간을 내어 해방촌에 모인 책방까지 겹겹이 쌓인 이들의 우정과 애정, 마음 씀씀이가 내게도 오롯이 전해졌다.
도서유람단 행사 내내 시절의 이야기에 많은 분이 귀를 기울여 주셨다. 준비한 책이 금세 동이 나 집에 몇 번이나 오가야 할 정도였다. 해방촌의 가파른 오르막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5분 남짓한 부재의 시간을 기다려준 이들, 문장과 문장을 천천히 읽으며 소화하는 이들, 고심해서 고른 책을 품에 폭 안고 웃으며 돌아가는 이들. 나는 그들의 기다림과 환대에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지 자꾸만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내가 만들고 있는 책이 사랑받고 있구나, 실감한 하루였고 그 끝에서 나는 용기를 얻은 것이 분명했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된 일이다. 막막한 시간을 견뎌야 하므로 외롭고도 괴로운 상태에 가깝다. 그 지지한 시간을 혼자 견디다 보면 끝을 알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고 마는데, 문제는 나도 모르는 사이 들어가버린 굴에서 정신을 차려보면 너무 깊은 곳까지 와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곤 한다는 것이다. 자괴감이나 자기혐오 같은 것들이 내 생활에 덕지덕지 붙어서 이상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그제야 알아챈다. 그런 나를 밝은 곳으로 꺼내주는 곳이 독자들과 만나는 페어다. 아직은 나를 모르는 이들과 책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대화가, 그들이 한 장 한 장 책을 넘기며 문장을 읽고 행간을 살피고 디자인이나 책의 꼴을 유심히 뜯어보는 장면은 내 과거를 긍정하게 한다. 내가 보낸 시간이, 만들어온 결과물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 같달까.
행사를 도와주러 온 『괄호 안 하트』 저자 김나연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도 곧 독립출판 10년 차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도 누군가의 선배로,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할 테다. 일 년에 하루, 전국에서 모여 서로의 마음을 쓰다듬어주는 이들처럼 나 역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어졌다. 자연스레 이번 행사를 마치고 난 뒤,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는 자주 내 머릿속에 있던 말이나, 이번 일을 통해 명확한 문장으로 쓰인 기분이다.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온 사람들, 오래 이곳에 남아 창작과 출판을 지속하는 이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가능하다는 당연한 사실의 목격자가 된 셈이다. 느리더라도 꾸준히, 바르게 내가 가야 할 길을 가야지. 자꾸만 잊게 되는 이 말을 다시금 새길 수 있게 해준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 전하고 싶다.
요즘 시절은 새로운 앤솔러지를 준비 중이다. 5월이 되어서야 원고가 모두 들어왔다. 예상보다 오래 걸렸지만, 그만큼 귀하고 좋은 글이 분명하다. 원고 뭉치를 읽고 또 읽는 와중에 한 달에 한 편씩 연재 중인 글을 마감하고, 가을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를 위해 영화를 보고 글을 쓰기도 한다. 또한 외주 편집 일을 틈틈이 해내고, 외부 행사와 강연을 위해 마이크를 잡기도 한다. 바쁜 일정이지만 무얼 해도 좋을 요즘의 날씨를 놓치지 않으려 산책과 약속도 빼놓을 순 없다. 커피 한 잔을 나누기에도,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에도, 노을을 보거나 술을 마시는 일에도 이만한 날씨는 없으니까. 그러니 단호하게, 그러나 애정을 담아 말해보자면, 당신도 지금 밖을 나서서 바람을 쐬고 걷기를. 읽고 쉬고 사랑하기를. 아프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