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되는 공간
어떤 영화는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그 순간 압도되고 매료되는 경험도 물론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일상을 보내는 와중에 문득문득 떠오르는 장면과 음악이 그 영화를 보다 사랑하게 만든다. 이런 마음은 짝사랑과 같을 것이다. 왜 자꾸 생각나지? 왜 자꾸 떠오르지? 그러다 불현듯 깨닫게 된다. ‘나, 이 영화 좋아하나 봐.’ 내게는 코고나다 감독의 <애프터 양>이 그런 영화다.
<애프터 양>은 안드로이드 인간 ‘양’과 함께 지내던 한 가족의 이야기다. 백인 남편 제이크와 흑인 아내 카이라 부부는 중국에서 입양한 딸 미카에게 동양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뿌리를 찾아주기 위해 중국산 안드로이드 양을 집에 들이게 된다. 하지만 양은 단순히 문화를 가르치는 본연의 역할을 넘어 맞벌이로 바쁜 부모를 대신해 미카의 곁을 지키며 마치 우애 좋은 남매처럼 줄곧 시간을 보낸다. 늦은 밤 잠에서 깬 아이와 함께 물을 마시러 가는 일은 아빠 제이크가 아닌 양의 몫이었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양이 떠난 후의 시간을 보여준다. 가족 댄스 경연 대회 도중 갑작스레 작동을 멈춘 양을 되살리기 위해 제이크는 여러 곳으로부터 수리 방법을 찾아 헤매고, 그 과정에서 양 안에 저장된 메모리 뱅크를 발견하게 된다. 양이 살아있는 동안 그를 냉장고나 세탁기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기계 정도로 여겨왔던 제이크는 양의 기록 장치를 살펴보며 점차 그의 생을 이해한다.
양의 기록 속에 저장된 영상의 대부분은 일상적인 장면들이었는데, 이를테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 찻잔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는 찻잎, 가족과 함께 사진을 찍던 순간의 정적 같은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난날을 되돌아보았을 때 잊히지 않고 불쑥 떠오르는 장면은 아주 사소한, 어쩌면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찰나의 순간이다. 그렇게 양의 메모리 뱅크 안에서 서로의 기억이 갈마들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떠나간 이를 추모한다.
영화의 OST ‘Glide’가 흘러나오는 엔딩 크레디트를 응시하며 이런 생각에 잠기게 된다. 만약 수많은 영상 기록의 합이 양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나의 삶 또한 지금껏 펴낸 책으로 대변되는 것일까. 몇 권의 책들이 나라는 존재를 떠올리기엔 제법 괜찮은 단서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 기억의 원형은 오래전 개설한 블로그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학창 시절 나는 온오프라인 모두에서 조용한 편이었다. 버디버디에 로그인해도 남들처럼 ‘ㅎㅇ’, ‘ㅎ2’와 같은 단체 쪽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저 몇몇 친구들의 접속 여부를 확인했고 그것으로 약간의 안도를 느꼈다. 싸이월드 시절에는 투데이 수와 일촌평 개수에 은근한 열등감을 가졌지만 이렇다고 할 활동을 하진 않았다. 친구들과 우리 다이어리를 공유할 때도 그저 관망했을 뿐이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동기들을 따라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스마트폰과 SNS가 빠르게 일상 속으로 스며들던 시기였기에 캠퍼스 밖의 시간을 공유하는 일은 무척 자연스러웠다. “너 지난 주말에 홍대 갔더라?” “너네 어제 수원역에서 술 마셨던데?” 당시의 나는 그런 흐름에서 소외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하지만 타인의 일상을 끝없이 들여다보게 되는 피로감과 나의 하루 역시 알고리즘 속에서 가볍게 소비되는 감각은 오래 견디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남기고 싶은 마음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그렇게 차선책으로 찾게 된 디지털 공간이 네이버 블로그였다. 굳이 찾아오지 않으면 남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조용하고 사적이면서도 공공연한 기록의 장.
2013년 여름, 블로그 첫 포스트를 게시했다. 동네 맛집이었던 조원시장의 뼈해장국 집을 찾아 국밥 사진 한 장과 함께 “국물 키햐…”라는 짧은 문장을 남긴 것이었다. 이후 나는 친구들과 수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먹은 음식들을 후기로 남겼다. 수원역 로데오와 인계동 나혜석 거리, 남문 지동시장과 화서역 먹자골목을 오가며 매운 갈비찜을 뜯고 곱창전골에 소주를 기울였으며, 우후죽순 카페가 생겨나기 시작한 행궁동에서 코코넛 커피를 마시곤 했다.
그즈음부터였을까, 나는 이전보다 세심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장면을 포착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음식 맛보다는 식당 안의 공기와 직원들의 표정, 알딸딸하게 취한 채 마주한 해 질 무렵 골목의 빛 같은 것들을 더 유심히 관찰하고 표현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남기고 싶었던 것들은 양이 메모리 뱅크에 남겨두었던 장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기록의 범위는 점점 음식에서 삶 전체로 번져갔다. 여행을 떠나면 잠들기 전 하루치의 감정을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냈고, 집으로 돌아오는 대중교통 안에서 그날의 사진과 짤막한 단상을 정리하여 블로그에 업로드하는 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블로그에는 음식과 여행 외에도 ‘문득’이라는 이름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독백하듯 툭툭 털어놓기도 하였다.
하지만 성실하게 쌓여가기만 할 것 같던 기록에도 멈춤의 시간이 찾아왔다. 바로 입대였다. 아무리 현실을 부정해 보아도 앞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전국의 맛집이 아닌 짬밥뿐이었다. 일 년 남짓 이어온 블로그가 내 안에 기록에 대한 사랑을 움트게 할 줄은 그 무렵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
군인이 되고 일병이 꺾어질 시기의 일이다. 오대기(5분 대기조) 훈련에 임하고 있던 어느 날, 상황 대기 차 들린 자그마한 병영 도서관에서 나는 우연히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민트색 표지의 여행 산문집으로, 책 속에는 먼 나라의 풍경과 여행지에서의 일화가 담겨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내 머릿속엔 입대 전의 기억들이 일순 스쳐 지나갔다. 길거리를 정처 없이 걷고, 두 발로 자유롭게 자전거 페달을 굴리고, 사진을 찍고 기록하던 시간이 떠오른 것이다. 나는 상황 대기 중이라는 사실도 깜빡 잊은 채 책 속에 빠져들었다.
당시 내가 속해 있던 대대는 서해안 GOP 근무에 투입되는 부대였다. 해안 소초에 한 번 들어가게 되면 6개월 동안 휴가 없이 경계 근무를 서야 했는데, 근무를 마친 뒤에는 비교적 긴 개인 정비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몸은 고됐지만 스스로의 내면을 지루할 정도로 살필 수 있는 시기였다.
그 무렵 상병이 된 나는 개인 정비 시간을 활용하여 독서를 했다. 그때 읽었던 산문집을 시작으로 책에 흥미를 붙였고, 그 관심은 자연스레 시집으로 관심이 옮겨 갔다. 독서 근력이 없다시피 했던 나는 200페이지가 넘어가는 소설은 펼쳐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기 때문에, 두께가 얇은 시집을 찾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시집의 시옷 자도 모르던 나는 남은 군시절 동안 최승자, 황동규, 심보선, 김기택, 이병률, 허수경, 기형도의 문장을 만나게 되었다. 온전히 그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낯선 표현들은 이상하리만치 오래 마음에 남았다.
책을 읽기 시작한 뒤로 시인처럼 나만의 문장으로 마음을 언어화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때부터 조금씩 시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짧은 단상들을 적어내기 시작했다. 가슴 속에 오래도록 풀리지 않는 의문들, 눈앞에 펼쳐진 장면들,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문장으로 남겼다. 그리고 그것들을 틈틈이 블로그에 옮겨 적었다.
*
전역 후에도 블로그는 삶의 저장소 역할을 톡톡히 했다. 맛집 블로그로 시작했던 공간에는 갈수록 여행과 단상, 상실과 후회, 미래와 관계에 대한 고민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지금은 예전처럼 활발히 블로그 활동을 이어가진 않지만, 지금껏 4천 개가 넘게 기록된 게시물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안쓰러워지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무얼 그렇게 남기고 싶었을까. 혼자서 고민하는 새벽을 얼마나 많이 지새웠을까. 어쩌다 나는 어떻게 기록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나 역시 양처럼 기존에 프로그래밍 된 역할과는 무관하게 무언가를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종국에는 누군가 나의 기억을 살펴 봐주리라는 작은 기대감으로 말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그동안 블로그에 남긴 수많은 글은 나만의 메모리 뱅크였는지도 모른다. 오롯이 내가 될 수 있던 공간 속에는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내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 블로그를 살펴보게 된다면, 그 안에는 내가 삶을 바라보았던 시선과 당신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마음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내가 되고 싶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