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흰 것
오종길
하루가 다르게 낮이 길어지는 시기다. 이제 책방을 마감하는 오후 7시에도 바깥이 어둡지 않다. 108계단을 오르며 뒤를 돌아 붉게 물드는 하늘을 바라본다. 나뿐만 아니다. 노을이 아름답게 지는 해방촌은 이 무렵 방문객으로 붐빈다. 너나 할 것 없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바쁜 사람들. 그들 사이로 시선을 사로잡은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해방촌오거리 주민센터 옥상에 앉아 노을이 지는 하늘을 아주 오랫동안 말없이 응시했다. 저 먼 곳을 가만히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은 아니나 다를까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 앉은 이. 이어 홀로 기도하던 장면까지. 그는 혼자였으나 쓸쓸해 보이진 않았다.
한 친구가 내일 장례식장에 가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선뜻 답을 보내지 못하고, 지난봄들에 떠나보낸 이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너무 당연하게 곁에 있던 이들. 이제는 보거나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당연해진 존재들. 얼마 전 아버지의 기일을 맞아 고향에 들렀다. 새벽을 가르며 달리는 차 안에선 이런 얘길 들었다. 진짜 마지막이 될까 봐, 아주 작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마주하기 두려워서, 그래서 당신이 잠든 곳에 찾아가지 못할 것 같다고. 그 여린 마음을 어찌 쓰다듬어줄 수 있을까. 주차를 하고, 까만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며 우리는 입을 꾹 다문 채 긴 새벽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친구는 최근 심해진 수면 장애로 며칠째 제대로 잠을 못 잔 것 같았다. 피로한 얼굴의 그가 장례식장에 들른 뒤 기진맥진한 채로 귀가할 모습을 생각했다. 이상한 기분이 되어 사람들 사이를 지나 말없이 돌아갈 자신의 집. 불 꺼진 방. 아직은 쌀쌀한 탓에 온기가 필요하다고 느낄 것 같았다. 나는 오늘 집으로 오는 길에 가로등 불빛에 밝게 빛나는 흰 꽃나무 사진을 찍었는데, 그에게 오늘 밤은 충분할 수 있을까. 아직 잠들지 않았을 것 같아서 늦은 답장을 보냈다.
“누군가의 부고를 받으며 나는 타인의 삶과 내 것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나의 외로움과 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사랑과 과거의 얼굴을 본다. 시간이 멈춘 죽음의 처소에서 사람들은 만나고, 자신의 일부를 그 곁에 두고 온다. 어떤 결속은 굳건해지고, 새로이 짝지어지고 이별하는 것들 속에서 나는 필요를 발견한다. 죽음의 맨얼굴 앞에서 탄생하는 약속과 지난 시간과의 헤어짐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게 아닐까. 죽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가 삶을 얼마나 사랑해서 그들을 위해 우는지, 그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순간들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배운다.”
― 『송이송이 따다 드리리』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속도로 봄을 맞이하듯,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한다. 떠난 이의 흔적을 간직하고 떠올리고 이름을 불러본다. 그리워하는 밤을 견디다가 남몰래 울기도 한다. 다음 날이면 씩씩하게 전화를 걸어 아직 곁에 있는 당신들의 안부를 물어도 본다. 같이 그리움의 노래를 부르지 않겠냐고 운을 떼보는 마음으로.
그러니 봄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 나는 어린 가지가 또 어린 가지를 내듯, 작은 마음을 힘껏 바깥으로 내보았는가.
파주의 한 도서관에서 전시 초청을 받았다. 전시장 한편에 작가의 작업 테이블을 구현하고자 한다는 사서님의 얘기에 쌓아둔 원고를 꺼내보았다. 교정지, 스케줄러, 메모나 낙서 등 다양한, 오랜 기록이 남아 있었다. 무엇 하나 버릴 수 없는 것들. 그와 동시에 모두 버린 것과 마찬가지인 이야기들. 지금과는 조금 다른 내가 거기 있었다. 한때의 기록을 살피며 깨달은 바는, 아무래도 봄은 준비의 계절이라는 것이다. 겨우내 모아둔 힘으로 잎을 피우기도 하나, 봄빛 아래서 조용히 나아가는 때도 있는 법이니까. 그런 이도 있는 것이니까. 봄밤엔 그런 일이 자연스레 벌어지는 중이다. 그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걷고 속삭이고 모른 척 지나가 보기로 한다. 봉오리를 틔우고 여린 싹이 돋아날 시간을 묵묵히 기다려주기 위해서.
봄은 채집하고 채록하기 좋은 계절이다. 피어나는 생명의 아름다움이 있듯, 지는 마음에도 아름다움은 있다. 갓 태어난 연둣빛 이파리를 톡톡 건드리고, 해가 지는 곳을 눈에 담고. 피고 지는 순간 속에서 어떤 하루를 보냈다 말할 텐가. 이 또한 봄밤에 생각해 보기 좋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