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양갱 산문
산책의 쓸모
시절 오종길
8월의 마지막 밤이네요. 다들 어떤 시간을, 계절을 보내고 계신가요? 내일이면 벌써 9월이라니, 그렇다면 이제 정말 가을이라니 믿기지 않습니다. 여전히 한낮의 기온은 30도에 육박하고 행인들의 옷차림은 가볍기만 한데 말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계절이 바뀌는 순간이 명백하지 않음을 알게 된 저는 지나는 계절과 다가오는 계절에게 안녕을 묻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로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 여름이, 가을이 흘러가버린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죠. 아무도 모르는 일을 벌이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된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나이 듦이 그저 쓸쓸하게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계절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바깥으로 나서서 길을 걸어봅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서 무작정 걸어도 되는 동네의 산책로가 있지요. 남산 아래 둘레길로 걸음을 옮겨 <앙금한 마음들> 두 번째 레터를 시작합니다.
밤이 깊은 시각에 종종 산책에 나선다. 해방촌을 찾아온 관광객이 떠나고 한산해진 거리를 누비는 이때가 하루 중 가장 귀한 시간이다. 복잡했던 머릿속을 정리하고 앙금처럼 남아있던 마음의 찌꺼기를 훌훌 털어내기도 좋다. 입추가 지난 지 오래지만 아직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려 걸음을 더할수록 옅게 밴 땀이 방울지기 시작한다. 푸른 은행잎이 빼곡한 포도를 걷다 보니 지금 이 감각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마치 일순간에 오랜 시간을 건너 지금에 와있는 것만 같다. 그렇다. 이번 여름에 나는 어느 때보다 산책을 하지 못했다. 한여름 밤 산책의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다. 찬바람을 가르며 소월길을 따라 걷던 지난겨울도, 하루가 다르게 힘껏 봄을 맞이하던 가로수 아래의 기억도 가득한데 여름 산책은 좀체 떠올리기 힘들다.
올여름 대부분을 멍하니 보낸 것 같다. 맹렬하게 울다가 한 생을 다하는 매미처럼 여름을 맞이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낸 기분이었다. 집 밖으로 나설 여력이 없어서 방문을 꼭 닫아두고 시간을 흘려보낸 날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여름의 대부분은 이런저런 일을 하느라 바쁘게 보냈다. 무어라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운 이런저런 일들. 무얼 안 한 건 아닌데, 분명 뭔가를 하긴 했는데 딱히 뭘 했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나 어제는, 지난주엔 무얼 했더라, 생각해 보아도 기억나지 않거나 기억해도 말하기 애매한 것투성이다. 사소하단 이유로, 결과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실 이런 생각의 시작은 보통 다음과 같다는 걸 알고 있다. ‘나 또 뭘 안 했더라.’ 해낸 것이 아니라 해내지 못한 것들이 자꾸만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놓친 것에 연연하고 있었다. 하지 못한 것, 오지 않은 것, 놓치거나 버린 것. 떼어내고도 남아있는 스티커 자국처럼 미련이 남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지지부진한 시간을 견디고 마주한 오늘은 다짐해 본다. 내일의 나에겐 이런 질문을 해보기로. 오늘 뭘 했더라. 기억이 흐릿하다면 메모장에 남긴 단상이나 사진첩을 다시 꺼내보기로. 삶은 원래 작고 보잘것없지만 그래서 귀하고 아름다운 거란 걸 잊지 말자고. 내 삶을, 오늘 하루를 세심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자고.
요즘은 저녁 7시에 퇴근을 하면 분명한 저녁이 되어있다. 여름에는 퇴근길도 밝았지만, 이제는 가을이 가까워지는 중. 해방촌 높은 언덕에 올라 노을이 지는 하늘을 가만히 내다본다. 그냥 보내기엔 너무 아까워서 사진도 찍는다. 저 커다란 풍경도 사진으로 담으니 작은 네모에 가득 찬다. 오늘도 나는 작은 하루를 잘 살아낸 것이다. 집으로 걷다가 멀어지는 여름이 아쉬워 동네 담벼락에 핀 능소화를 한 번 더 눈에 담는다. 아침에는 친구가 챙겨준 아오리 사과를 챙겨 먹는다. 가는 여름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은행잎이 물들어가는 속도로 천천히 그리고 부지런히, 아주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기분으로 다가오는 가을과 친해지기 위해 소월길을 따라 걸으면서 하루하루를 홀로 곱씹고 싶다. 황혼에 물들어 가는 저녁들이 계속 내게로 올 것이다. 하얏트 호텔 앞에서 걸음을 돌려 왔던 길을 도로 걷는다. 여름밤 소월길을 계속 걸으면 어느덧 가을이 오고 겨울이 되어 있겠지. 남산도서관을 지나 불어오는 바람에 여름과 가을의 냄새가 섞여 있다. 밤 산책을 핑계 삼아 오고 가는 것들의 면면을 다시금 떠올려보다가 뒤를 돌아본다. 안녕, 하고 인사할 얼굴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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