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여전히 어린이인가요?
시절 오종길
출판사 시절은 크게 세 부류의 도서를 출간하고 있다. 먼저, 네 명의 작가가 사계를 통과하며 각 계절을 해석한 소설 ‘사각사각’ 시리즈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펴냄으로 완간하였다. 그리고 매해 특정 주제로 기획하는 에세이 앤솔러지와 한 작가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시절산문’ 시리즈가 있다. 그중 ‘시절산문’은 지난해 유월 서울국제도서전에 맞추어 1, 2권을 동시 출간하였으며 다가오는 봄, 3권을 준비 중이다.
‘시절산문’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자면, 시절 대표로서 새로운 시리즈의 첫 주자를 맡고자 『나의 수무월』을 펴냈고, 안윤 작가의 『제목 없는 나날』을 함께 선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김현 시인의 산문 원고를 받았다. 요즘은 새 원고를 이리저리 뜯어보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내는 중이다. 어쩜 이리 귀한 글을 써 보내주신 걸까. 시절이 품게 될 서른여 편의 산문이 내게로 왔구나, 실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가 미소 짓기를 반복한다. 이런 내 모습에 주책이야 주책 싶다가도 이러지 아니할 도리를 찾을 수가 없어서 지금을 즐기기로 마음먹는다.
1월 말 성북구의 카페 밑줄에서는 어김없이 ‘듀엣 낭독회’가 열렸다. 듀엣 낭독회는 매달 한 차례씩 김현 시인이 짝꿍 시인을 초대해 말 그대로 듀엣이 된 두 시인이 시를 읽고 대화하는 자리다. 낭독 행사를 마치고 김현 시인과 창가 자리에 마주 서서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두 부의 계약서를 하나씩 나눠 가지며 출판의 무게를 새삼 실감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이런 것이구나. 상기된 얼굴인 게 나 혼자만이었는지, 김현 시인도 마찬가지였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를 둘러싼 이들 면면에 미소가 옮겨붙는 것만은 확실했다.
김현 시인과는 ‘사각사각’ 시리즈로 함께 작업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어째서 이번에는 더 떨리는 걸까. 이 떨림의 이유를 알고 싶지만, 내가 알고 있고 알 수 있는 건 너무 적다. 묵묵히 그의 원고를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겠다.
김현 시인을 알거나 그의 시와 산문을 읽어본 이라면 잘 알 테지만, 그는 늘 주변 사람들에게 살갑다. 다정한 얼굴을 그려 보라면, 가장 먼저 그를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또한 그는 곁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잘 포착하는 사람이다. “새소리를 들었고, 손차양하고 고개를 들어 짙고 연한 초록빛 나뭇잎들을 보았고, 길가에 떨어진 작은 깃털 하나를 주웠다. 텅 빈 놀이터 벤치에 앉아 아직 열기가 스며 있지 않은 바람에 더위를 식혔다.” 이런 그의 문장을 읽으면 절로 투명한 마음이 된다. 하나, 매일의 날씨가 화창하지 않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귀갓길에 근린공원 벤치에 혼자 앉아 하늘, 별, 달을 보았다. 왜, 가끔 그럴 때 있잖아. 외롭지 않은데 외롭고, 그립지 않은데 그립고.” 이런 맘이 되는 날도 있음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준다.
차와 바람의 맛을 제대로 알게 되는 순간부터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에서 말했듯, 어른은 차근차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책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어른을 지나 다시 마주하는 어린이에 대해서. 그러고 보면 김현의 산문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어린이가 된다. 마침 이런 문장이 나를 반긴다. “최근 길을 잃은 채 살고 있다는 기분을 자주 느꼈다. 마침내 그런 시절에 닿은 것이다. 더는 올라가고 싶지도, 흘러가고 싶지도 않은. 살며 얻어야 할 것보다 살며 잃어버린 것들을 수시로 떠올렸다.” 그에게 투정을 부리면 보드라운 손길로 감싸줄 것 같아진다. 어느 시절에는 한 권의 책을 마무리하며 이런 문장을 적어둔 적이 있다. “차창으로 햇빛이 들어왔고, 눈이 부셨다. 아주 어른 같던 그가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운전대에 얹어둔 손등의 주름과 소매의 때가 눈에 들었다. 잔잔한 진동이 느껴졌다.” 김현 시인의 산문을 읽다 보니 절로 떠오른 문장이다. 그가 어른에 가까운 것인지, 어린이라 해도 될지 모르겠다. 이를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누구에게나 “근사한 시절”이 있을 테다. 우리는 그 자취를 이번 산문을 통해 속속들이 살필 수 있을 터.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가장 먼저 남겨두고 온 흔적들을 말이다. 나는 그에게서 자주 겨울의 정취를 느끼는데 “눈이란 대단해. 세상의 높음을 이토록 낮아지게 하다니. 감탄하면서.”라는 문장은 겨울을 향한 김현의 시선이 얼마나 사려 깊은지를 들려준다. 또한 그는 “사람이 사람의 받침이 되어 주는 일에 관해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다. 김현은 받침의 시인이다. 누구보다 먼저 낮은 자세를 자처하고 그곳의 사정을 두루 매만져준다. 가장 낮은 곳에서 그와 함께 누군가를 받치는 모양새가 되어봄은 어떨까. 그렇다면 나는 이 원고를 잘 매만져서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내가 느낀 미세한 떨림을 곧 선보일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