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선물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새해 루틴이 있다. 가족과 해돋이를 보러 간다거나, 소중한 이에게 연하장을 보낸다거나, 고요히 지난해를 돌아본다거나… 그런 자기만의 루틴이 나에게도 있다. 옷장을 비워내는 것이다.
한 해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을 과감하게 옷걸이에서 덜어내는 일.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케케묵은 감정도 함께 털어내는 일. 평화로운 주말 오전, 하루 날을 잡고 미뤄둔 마음을 정리한다. 여름옷, 겨울옷, 간절기 옷 할 것 없이 서랍장이며 붙박이장이며 모든 서랍을 샅샅이 뒤지고 골라낸다. 그럴 때면 잊고 있던 감정이 되살아나듯 ‘내가 이렇게 촌스러운 옷을 샀다고?’ 싶은 순간이 있고, 그때에는 이상하다 싶었던 옷이 지금 보니 괜찮다 싶은 의외의 순간도 찾아온다. 살이 쪄 허리가 맞지 않는 바지가 있고, 반대로 헐렁했던 허리춤이 딱 맞는 경우도 있다. 한바탕 나의 주변부를 정리하며 덜어낼 것과 가져갈 것을 구분하고 새로운 1년을 다짐하는 의식을 치른다.
그렇게 얼마간 홀가분하게 시작한 한 해였지만 마음이 그리 가볍지 않았다. 연말연시의 새해 블루는 어김없이 날 찾아왔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마음을 견뎌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야만 알 수 있는 것들,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들. 이를테면 처음으로 기획하는 「2026 디어마이리더 북페어」 참가팀 마감이라든가, 네 번째 참가를 기대하고 있는 서울국제도서전 결과도 모두 1월 말에 발표가 되기 때문이다. 폭풍전야의 무게를 견디며 일상을 보내고 있던 때, <흑백요리사 시즌2> 마지막 화를 보내게 되었다.
마지막 미션에서 최강록 셰프는 자신을 위한 요리로 그동안 선보였던 조림 요리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재료들을 잔뜩 올린 국물 요리를 준비했다. 식탁에 심사 위원들과 마주 앉아 자신이 만든 요리를 설명하는데 가슴이 쿡쿡 쑤시는 발언이 이어졌고, 이 대목에서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저를 위해서는 90분이 아니라 단 90초도 요리를 해본 적이 없어요.”
오랜 기간 요리를 하며 살아온 그가 정작 자신을 위한 요리를 해본 적이 없다니. 그의 말을 듣는 뒤편의 여러 셰프와 요리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그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몹시 뜨거워지며 며칠 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새해의 첫 독서모임이자 해당 모임의 마지막 회차에서 한 모임원은 내게 “모임장님도 자신을 위한 선물을 해보세요. 그런 사소한 기억이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자조적인 성격을 간파한 그가 건네는 걱정 어린 조언이었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자리에 앉아 자문하곤 했었다. 나는 나에게 선물이란 것을 건넨 적이 있나 하고서.
때문에 나에게는 최강록 셰프의 요리가 경연 우승을 위한 결과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선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선물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음이 부러웠다. 깨두부, 표고버섯, 송이버섯, 대파, 다시마, 호박잎+성게알, 순무, 스냅피. 따뜻한 국물 위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둘 얹은 그처럼, 내가 한 아름 안을 수 있는 둥근 품에 나를 위한 것들을 채워내고 싶었다. 비워낸 만큼의 여백을 나를 위한 선물로 채워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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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선 새 요가복을 마련했다. 수련은 몸과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어떠한 다른 운동처럼 장비빨을 받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왔지만, 사실 그 간사한 마음은 요가복을 사는 게 아까웠기 때문이다. 모처럼 요가 브랜드 부디무드라에서 검은색 조거 팬츠를 샀다. 이제 더 이상 추운 겨울날 반바지 위에 긴바지를 덧대 입은 채 요가원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
동네에 있는 주류 판매점에서 텍스트북 와인을 샀다. 편의점이나 기업형 슈퍼마켓에서 만 원 이하의 가성비 와인만을 먹던 내게 6만 원대 레드 와인을 사치에 가까운 소비였지만, 이번에는 넉넉한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작은 사치를 허가하기로 한다. 게다가 이름이 텍스트북이라니. 마시면 마실수록 괜히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와인은 친구 생일날 고깃집에 가져가 콜키지 와인으로 다 같이 즐겼다. 역시 좋은 술은 함께 나눠 마실 때 좋은 법이었다.
새 시계도 샀다. 박연준 시인의 시집에서 언급되는 「아비정전」을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되었는데, 그 덕에 장국영의 매력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나는 주인공에게 매력을 느낄 때 그가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을 따라 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기는 편이다. 예전에는 「패터슨」을 보고서 아담 드라이버가 착용하고 있는 시계의 모델명을 찾아 같은 시계를 구매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장국영이 늘 끼고 다니는 가죽 시계와 비슷한 스타일의 시계를 구매했다. 검은 시곗줄에 하얀 다이얼로 된 세이코 가죽 시계를 말이다. 앞으로 메탈 시계와 이 가죽 시계를 때에 따라 골라 착용하기로 마음먹는다. 나를 위한 선물은 나의 선택지를 늘려주는 일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손수건 보관함을 구비했다. 지난여름 『전시된 마음』이란 산문집을 펴내게 되었다. 서른이 된 이래로 적어낸 2년여의 글과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책으로, 나의 한 면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되고 있다는 감정을 풀어낸 문장들이 많아 그러한 제목을 짓게 되었다. 개중 한 목차에 손수건을 쓰게 된 경위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내었는데, 몇 달 뒤 생일에 주변 이들로부터 손수건 선물을 여럿 받게 되었다. 고작 서너 개의 손수건을 돌려쓰던 나였는데 손수건이 일곱 개, 여덟 개가 되더니 이제는 열 개가 훌쩍 넘어 열세 개의 손수건을 갖게 된 것이다. 매번 옷장 한 켠에 널브러져 있는 손수건들을 모여 마음이 쓰였던 터라 이번 기회에 손수건함을 마련해주었다. 열여섯 칸으로 나뉜 아크릴 함에 고이 접은 손수건을 하나하나 꽂아두었다.
*
당신은 자신에게 어떤 선물을 주는 사람인가요?
타인을 생각하듯 나를 위한 선물을 준 적이 있나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1월이 가기 전, 나를 위한 선물을 건넬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그것이 크건 작건, 비싸건 비싸지 않건 전혀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되려 소박할수록 좋겠지요. 최강록의 담백한 국물 요리처럼, 양말 보관함을 손수건함으로 사용하는 저처럼 말이지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