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비가 내린다. 며칠째 지속되는 가을비다. 나는 그런 날에 청바지 밑단을 적시는 빗길을 뚫고 2층 카페 귀퉁이에 자리를 잡는다. 진동벨이 울리자 1층으로 내려가 아이스커피와 애플파이를 가지고 테이블로 돌아온다.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다.
빨대로 갈빛 음료 위의 하얀 크레마를 휘젓고 길게 음료를 들이켠다. 왼손엔 나이프를, 오른손엔 칼을 쥐고 애플파이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부드럽게 갈라지는 파이 안에서 시나몬 향 가득한 사과 알갱이가 속엣말을 꺼내 놓듯 쏟아진다. 나는 그것들을 옆으로 뉘운 나이프에 정성스레 올려 입으로 가져온다. 으으음, 달달하고 맛나다.
파이를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며 수많은 베이커리 중 애플파이를 고른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평소 즐겨 먹던 무화과 치즈크림 바게트도 아니고 소금빵도 아닌 애플파이를 집어 든 이유는 무얼까. 어젯밤 ‘사과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시를 읽어서일까. 입맛에 맞는 걸 보니 가끔은 무의식에 선택을 맡기는 편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안희연 시인은 「미결」이라는 시에서 사과파이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어떠한 사연이길래 저 작은 파이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았을까. 아무래도 소중한 이가 만들어 준 파이가 아닐까 감히 짐작한다. 나 또한 돼지고기 김치찌개나 매콤한 닭볶음탕, 쇠고기뭇국과 같은 특정 음식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시큰해지곤 하니까. 사과 알갱이를 오독오독 씹으며 시구를 내 식대로 오독해 본다.
카페에 앉아 애플파이를 먹고 있는 오늘을 떠올리면 나도 눈물이 나려나. 스쳐 지나가는 날 중에 하루일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나의 생일이므로 제법 기억에 남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다시 칼을 쥐고 파이를 반듯하게 잘라 입안에 크게 넣는다. 그러는 사이, 태어난 날의 태어난 시간이 지나간다. 태초의 날이 나를 수십 번이고 감고 지나갔지만 시의 제목처럼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미제로 남은 기억들이 많다.
미결된 마음이란 얼마나 지난한가. 기억의 공소시효는 제 마음대로라서 어떤 일은 빵칼로 바게트를 잘라낸 듯 기억 속에서 매끈하게 잘려나가는 반면, 어떤 일은 그 빵을 자르며 잘게 부서진 부스러기처럼 사위에 난잡하게 흩어져 있다. 영원한 사랑으로 기억되기 위해 스스로 미결의 사건이 된 <헤어질 결심> 속 서래처럼 나의 미결은 어떤 영원을 바라는 걸까. 아아, 부스러기 같은 가벼운 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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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일에 받은 선물은 그동안 받아온 선물과 결이 달랐다. 요가 매트, 북커버, 시집, 고급 노트(이름이 무려 고급 노트다), 손수건, 술잔, 와인…. 이제 나는 타인에게 요가를 하고 책을 읽고 무언가를 끄적이며 줄곧 손수건을 챙겨 다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물론 술쟁이 이미지도 빼놓을 수 없다. 많은 경우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 내게 그들은 선뜻 연락을 전해온다. 다정한 생일 축하 메시지로도 모자라 나의 취향을 고려한 선물까지 곁들여 준다. 그런 귀한 마음을 받으면서 나는, 내가 누군가의 취향에 맞는 글을 적어내고 있는지, 단지 내 입맛에 맞는 글을 지어놓고 숟가락을 얼굴 앞으로 억지로 들이밀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을 조금 했다.
생각해 보면 이들의 마음이 꼭 가을비 같다. 여름을 지나 가을이 오는 길목에 이렇게나 자주 비가 내릴 줄 누가 알았을까. 예상치 못한 마음이 나를 적시고 있는 것이다. 바짓단이 부지런히 적셔지듯 마음 한 켠이 축축해지는 시월의 어느 날, 빗물에 휩쓸려 가는 낙엽을 바라본다. 멀어져 가는 것들에게 조용히 안녕을 고한다.
한때는 생일이라는 명목하에 연락을 받는 것이 두려워 카카오톡 생일 알림을 꺼둔 적도, 친한 이에게서 축하 연락이 오지 않아 한껏 옹졸해진 적도 있다. “네가 어떻게 내 생일을 까먹을 수 있어?” “내가 얼마나 네 생일을 꼬박꼬박 챙겨왔는데!” 그때의 나는 무엇을 바랬던 걸까. 이제는 축하를 바라는 마음도, 축하를 피하려는 노력도 귀찮아져버렸는데. 작은 일에 크게 반응하던 그때의 마음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마음으로 남아있다. 이제는 고작 동네 카페에 앉아 어제 읽은 시구와 같은 빵을 발견하고 입안에서 그 단어를 공글리는 사람이 되어있을 뿐이다. 애플파이 속을 갈랐을 때 쏟아져 나오는 것들을 보면서도 크게 동요치 않는 그런 사람이. 그저 예상치 못한 시나몬 향에 웃음 짓는 그런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