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시작이야
오종길
어느덧 선선한 바람이 불고 창밖 풍경에도 미묘하게 가을의 색감이 묻어난다. 그렇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9월이다. 8월 마지막 밤엔 달력을 넘기며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른 건지 모르겠다고 혼잣말을 뱉었다. 이미 새벽이 깊었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고 지친 몸을 뒤척이며 앓는 소리를 반복한다. 뭣 때문에 이렇게 바쁘게 지낸 건지. 범인은 대체 누군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포켓몬스터의 악당은 언제나 로켓단이듯, 내 시간을 가로챈 범인은 다가올 행사와 신간 준비가 분명하다. 이번 주 금요일부터 3일간 <2026 서울 퍼블리셔스 테이블> 행사가 열린다. 올해 초부터 차근차근 준비한 행사의 막이 열리기 일보 직전인 것이다. 마치 무대에 서서 커튼이 걷히기를 기다리는 배우가 된 것 같다. 막을 걷으면 마주할 수많은 눈동자를 떠올린다. 지금 나는 떨리는 건지, 두려운 건지, 설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잔뜩 고양된 채로 9월을 맞이했다.
겨울이던 1월에 시작하여 봄과 여름 내내 일을 했다. 매일 무언가를 하는데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일 하나 없는 날이 수두룩했다. 한숨이 푹푹 나와서 퇴근을 하고도 집에 가기 싫고, 잠도 오지 않아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마치 나를 잘 컨트롤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인 것만 같았다. 투자는 있는데 수익은 없는, 정확히는 아직 수익일지 손실일지 알 수 없는 채로 준비하는 과정은 어렵고 고단함을 다시금 느낀 시기였다.
달리 생각해 보면 내가 하는 일이란 게 대수롭지 않아서 그랬던 것도 같다. 어느 날엔 그런 생각이 오히려 힘이 되기도 했는데, 정말 오락가락한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딴짓을 하기도 했다. 다른 일을 궁리하거나 일을 대신해 청소나 빨래에 몰두하거나. 어쨌거나 기진한 채로 소파에 앉아 다들 어떻게 이 많은 일을 해내고 사는 건지, 그들의 마음은 어떤 상태인지 늘 궁금해했다. 나와 비슷할까, 아니면 나와는 아주 다를까.
예년과 달리 9월로 행사를 당기며 이번 여름에는 본격(?) 휴가를 포기하고 행사 준비와 신간 준비, 외부 강의나 외주 편집 일을 부지런히 해냈다. 시원하고 안전한 사무실/책방에 앉아서 뙤약볕을 내다보는, 고요하지만 속에선 시끄럽게 분투하던 내가 그곳에 있었다. 훗날 올여름을 떠올리면 필터를 한 겹 씌운 이미지로 기억날 것 같다. 여름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 발짝 떨어져서 여름을 바라보았으니까.
서울 퍼블리셔스 테이블에서 펼칠 시절 부스를 꾸리며 신간을 두 권 준비했다. ‘시절산문’ 네 번째 산문집 이소연 시인의 『계절의 손잡이』와 권누리, 김리윤, 김선오, 김현, 송희지, 정재율, 황인찬 시인이 함께 쓴 『예사롭지 않아』이다.
소연 시인의 산문을 읽으면서 자주 웃은 기억이 있다. 한 코, 두 코 무늬가 되어가는 뜨개질을 보듯 창문 너머 어스름이 깔릴 때까지 삶을 돌아보기도 했다. 아마 소연 시인의 산문이 가진 힘일 것이다. 많은 이들과 그 웃음, 웃음 이면의 마음을 나누게 될 것 같아서 기대 중이다.
일곱 시인의 시와 산문은 지난봄부터 고심한 원고다. 6월 출간을 목표로 했다가 여름에는 꼭 선보이고 싶었는데 9월까지 품에서 놓지 못한 것이다. 이 책의 예사롭지 않음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준비가 된 것 같다. 때가 된 걸 수도 있다. 내가 하는 일이란 고작 버튼 하나 누르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밀고 나가는 힘, 함께 감응하고 연대하며 목소리를 내는 과정은 작가-독자가 해내는 것일 테니까. 그 엄청난 흐름에, 시작 버튼을 누르려 한다.
자~ 이제 시작이야 (내 꿈을)/ 내 꿈을 위한 여행 (피카츄)/ 걱정 따윈 없어 (없어)/ 내 친구랑 함께니까
어릴 적 텔레비전 앞에 앉아 포켓몬스터 한국어 주제가 가사를 따라 부르던 내가 있다. 이제는 서른이 넘었지만, 우리들의 마음속엔 아직도 지우와 피카츄의 열정이, 길을 떠나는 이의 힘찬 마음이 남아 있다. 시절뿐 아니라 올해는 팥양갱의 여덟 출판사가 모두 행사에 참가한다. 그러니까 이 노랫말은 내게 하는 말이자, 팥양갱 동료들에게 하는 말이며 동시에 관람객으로 마주할 당신께 드리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 친구들과 함께니까 걱정 말자고. 자,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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