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렴 여름에는
입추가 지났습니다. 태양과 정수리 꼭짓점이 마주 볼 때는 더위가 한창이지만요. 유월만 해도 밤에는 제법 달릴 만했어요. 아침저녁으로 되게 선선하다. 뭔가 여름이 여름 같지 않네. 이 말을 입술에 달고 살다시피 했습니다. 조금 방심한 탓일까요. 하루는 아침부터 징그럽게 울려대는 폭염 경보를 얕잡아 보았다가 그만 된통 혼이 나고 말았습니다.
올해 여름은 불을 쓰지 않고도 차릴 수 있는 레시피만 골라 끼니를 때웠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간단히 점심을 먹고 시원한 커피도 살 겸 잠시 걷기 위해 신발을 신었습니다. 한증막 뺨치는 열기 속을 걷고 또 걷다가. 갑자기 스위치라도 누른 듯 웬 객기가 발동한 것인지, 달리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해 공원 두 바퀴를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깨달음, 아- 칠월 한낮의 폭염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이었음을. 밤새 온몸을 잠식한 열기가 출구를 찾지 못해 시름했습니다. 이러다 큰일 치르겠다 싶어 잠시 뜀박질과 거리를 둔 여름이었어요.
그럼에도 나는 여름에 달리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온몸으로 계절과 생을 실감할 수 있어서요. 대개는 해가 완전히 얼굴을 감추면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섭니다. 손목과 발목을 굴리며 작은 원을 그려요. 털레털레 공원으로 향합니다. 어느 날에는 최후의 소지품인 스마트폰과 이어폰도 두고 나와요. 최대한 간소하게 추립니다. 횡단보도 건너 멀찍이 보이는 공원 초입. 먼저 나온 사람들이 줄지어 달리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무리 지어 헤엄치는 물고기 떼처럼 느껴져요.
후우- 흡- 후우- 흡-.
출발 지점인 공터에 서서 요리조리 몸을 비틀어요. 뻣뻣한 근육을 푸는 동안 후텁지근한 바깥 공기와 종일 머금고 있던 숨을 천천히 섞어봅니다. 몸 어딘가 꽁꽁 숨어있는 아가미를 깨운다는 상상. 그런 상상을 해요. 후우- 입으로 내뱉고 흡- 코로 들이킨 다음,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면 어떤 눈을 감아요. 어떤 마음은 셔터를 내려요. 다른 감각을 열어요. 물속에서 눈을 뜨는 게 아마 그런 기분일 거라고요.
모든 감각을 나에게로 기웁니다. 휘청거리지 않도록 발 전체를 꽉 잡은 러닝화의 푹신함, 발바닥과 지면이 닿을 때마다 들리는 규칙적인 마찰음, 몸을 감싼 얇디얇은 기능성 섬유가 저들끼리 스치며 만드는 리듬, 거기에 착실히 따라가는 호흡까지. 공기 중에 떠다니던 습기가 살갗에 빨판처럼 척척 달라붙기 시작하고 숨이 차오를 때쯤. 손을 뻗어 길가에 핀 초록을 만집니다. 계절이 주는 응원에 힘입어 다시금 숨을 가다듬어요.
도심 속 공원에는 저마다의 소리가 파도처럼 어우러지기도 합니다. 차량 엔진 소리 사이사이 신호등이 바뀌는 소리. 사람들 목소리 사이사이 공을 차고 던지는 소리. 그리고 내가 살아있어요. 여기 살아있어요. 찰나의 존재를 알리는 매미 울음. 이어폰을 두고 나온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여름이 만드는 순간에 기울다 보면 별다른 음악이 필요하지 않을 때가 있기도 하니까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는 이들과 함께 달리다 보면, 종일 구부정하게 무릎을 안고 모니터와 씨름하던 인간의 형상은 아득해져요. 건조하게 흘려보낸 하루 끝이 조금은 축축해도 아무렴 괜찮다고요. 어느덧 나도 물결을 이루는 한 마리 자그마한 은빛 물고기.
언니, 우리 올해는 제철 음식 잘 챙겨 먹기로 했잖아.
헤엄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뜨거운 물로 몸을 적시는 동안 친구가 보내온 복숭아를 떠올립니다. 지난밤 미리 잘라둔 복숭아는 얼마나 달고 시원할까요. 욕실 거울에 찬 습기를 닦아내고 나와 선풍기 바람에 머리를 말려요. 아삭한 복숭아를 베어 물면-
콧잔등 위 주근깨, 땡볕 아래 느긋한 산책, 커다란 대야에 비빔국수, 우유를 넣고 찐 초당 옥수수, 자두 사탕과 수박 주스, 밤하늘, 진로 소주와 해창 막걸리, 붉은 립스틱. 한입 크기로 잘라 입에 쏙쏙 넣어주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이 생각나요. 아직 쓰고 싶은 여름이 남아 있어 다행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