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 생활 일지
더 멀리, 오래도록 고맙도록
시옷과 리을 사이 박수진
안녕하세요- 인사가 무색할 만큼 시간이 흘렀습니다. 꽤 오랜만에 순서가 돌아왔어요. 잘, 아니지(절레절레).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요즘에는 단순히 잘 지내냐는 말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내는지 묻고 싶어요. ‘잘’이라는 말에 뭉뚱그려지기에는 겨울과 봄 사이를 어슬렁거리던 마음이 다소 꿀꺽, 삼켜질 수도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조금 자유로이 레터를 적고 있어요. 근래에는 책을 자주 펼쳐보지 못하기도 했거든요. 가끔은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스스로 발목을 꽁꽁 묶어두는 기분이 들어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편지를 쓴다’ 생각하면 한결 편안한 호흡으로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해가 바뀌고 삼 개월이 도무지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습니다. 디어마이리더 북페어 운영진을 맡게 되면서, 몸과 마음과 생각이 영차영차 2인 3각 하듯 꾸준히 하나의 점을 향해 달렸습니다. 익숙한 일상의 궤도에서 벗어나 마주하는 사람과 사건들이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이미 그것을 만져본 적 있는 것마냥 신중히 생각하고 대하는 태도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나의 이면이란 언제나 이처럼 손바닥 뒤집 듯,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영원히 뒤집지 않은 채로, 뒤집지 못한다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 늘 생각이 과해서 저 자신마저 피곤한 존재라 치부하고 다그치며 살아왔다 생각했는데. 문득 돌아보니 나는 매사 깊숙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진심 가까이에 머무를 수 있었다는 것을 부쩍 깨닫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시선에 맥이 탁 풀려요.
디어마이리더를 준비하며 책을 만들기 시작했던 때가 자주 떠올랐어요.
2016년, 스물여섯 봄이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마지막 남은 퇴직금을 닥닥 긁어모아 책이란 걸 만들었지요. ‘쇄’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책 맨 뒷장에서나 봤지, 삶에 적용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쇄당 최소 몇 권이어야 하느니, 그런 건 따질 여력도 없이 그저 여건이 되는 선에서 첫 책을 뽑았습니다. 책들은 박스 몇 개에 실려 5평짜리 작은 원룸으로 도착했습니다. 나를 닮아 작은 책들은 작은방 한구석, 작은 박스에 갇혀 여름이 오도록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부끄럽다거나 두렵다거나, 지금으로서는 또렷하게 설명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감정이 왈칵 나를 덮쳤습니다. 정말이지 아-무 것도 몰라서 무작정 배낭과 에코백 두 개를 책으로 꽉꽉 채웠어요. 보도블록이 절절 끓고 정수리가 녹아내리도록 뜨거운 여름날, 온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마포구에 위치한 몇몇 독립 책방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맘때 나에게 나의 책은 마치 물가에 내놓은 자식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누가 이 책을 데려가 줄까, 어디 가서 괜한 눈초리나 홀대받지는 않을까, 어떤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품어줄까, 돌고 돌아 그 마음이 나에게 닿는 날이 올까. 두 번째 책을 만들도록 테이블 앞에 서는 것을 무척이나 망설였어요. 그러다 드디어 스물여덟 봄,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운 쫄보가 불쑥 용기 내어 첫째와 둘째라 부르는 책들을 데리고 첫 소풍을 나가게 되는데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살아가던 이들이 테이블 앞에 잠시 멈춰 섰습니다. 책을 통해 연결되고 목소리와 시선을 나누었습니다. 어쩐지 자꾸만 고마워서 준비한 책과 엽서를 포장할 때 말고는 좀처럼 앉아있지 못하고 서있기를 자청했습니다. 영원히 몰랐을 수도 있는 세계가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나도 아직 어딘가에 속해있구나. 북페어 현장 한가운데서 조금은 벅찬 호흡으로 케케묵은 조바심을 훠이훠이 쓸어버렸습니다.
돌이켜보면 항상 나와 내 책 곁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함께 원고를 모으고 노트북 앞에 모여 앉아 편집했습니다. 함께 인쇄소에 다녔습니다. 함께 책방 문을 두드렸습니다. 나의 느린 걸음과 움츠러든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작은방 밖으로 나오기를 격려했어요. 누군가는 책방 한 켠을 내어주고, 누군가는 평평한 징검다리가 되어주었습니다. 두 발로 힘껏 딛고 까치발로 종종거리다 보면, 어김없이 또 누군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내가 이웃이라 부르는 이의 안부이기도 했고, 여전히 쑥스럽지만 나를 작가님이라 불러주는 이의 응원이기도 했습니다. 아주 오래전, ‘용기의 연쇄’에 첫 단추를 꿰어준 그들이, 여정 끝에 건넨 마음을 여태 기억하고 살아갑니다.
'수진아, 우리가 너에게 준 마음을 꼭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아도 돼. 너의 힘이 필요한 다른 친구들에게 그 마음을 주면 돼.'
어쩌면 때마다 대가 없이 받은 커다란 무언가를 오늘날 이렇게 갚고 있는 게 아닐까. 그 무언가 덕분에 느슨하지만 꾸준히 이 세계 안에 머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 무언가가 다시 사람들 곁에 나를 데려다준 게 아닐까. 나름대로 자신의 집을 짓고 책을 짓고 살아가는 이들을 앞으로도 이웃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이웃들과 함께 ‘용기의 연쇄’를 이어가고 싶어요. 그런 마음가짐으로 디어마이리더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더 멀리, 오래도록 고맙도록. 이 진심을 전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