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원고를 받았을 때 붙어있던 원제는 지금과 다른 것이었다. 보자마자 그 제목이 맘에 들었고, 원고를 읽고 나니 아니나 다를까, 글 뭉치를 힘 있게 잡아주는 느낌이 들어서 바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1월에 받은 원고를 들여다본 시간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시는 낮은 곳을 살피는 언어임이 틀림없고, 시인은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곳에 자리 잡는 사람이다. 김현 시인은 마치 사활을 건 듯 아무도 없는 곳에 가장 먼저 등불을 밝힌다. 하나둘 사람들을 불러 모아 온기를 더하고 다시 어두운 데를 찾아 나선다. “사람이 사람의 받침이 되어 주는 일”에 문학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 낮은 곳의 사정을 어루만지는 김현은 받침의 시인이 분명하다. 그가 힘써 받치는 일엔 무엇이 있을까.
“새소리를 들었고, 손차양하고 고개를 들어 짙고 연한 초록빛 나뭇잎들을 보았고, 길가에 떨어진 작은 깃털 하나를 주웠다. 텅 빈 놀이터 벤치에 앉아 아직 열기가 스며 있지 않은 바람에 더위를 식혔다”는 문장 앞에서 절로 투명한 마음이 되었다가, “귀갓길에 근린공원 벤치에 혼자 앉아 하늘, 별, 달을 보았다. 왜, 가끔 그럴 때 있잖아. 외롭지 않은데 외롭고, 그립지 않은데 그립고”라는 고백을 마주하니 인생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구나 싶다. 생의 환함과 어두움을 고루 살피고 그 속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을 문장으로 담아낸 김현의 산문은 그의 시와 마찬가지로 일상에 가까이 와 있다. 마치 여기에 뺨을 대고 가만히 진동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원고마다 떠오르는 고유의 이미지나 색깔이 있는데, 김현 시인의 이번 산문은 살랑이는 동작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건 노랑에서 초록으로 이어지는 색(빛)의 스펙트럼이었다. 그래서인지 표지에 연둣빛이 은은하게 감돈다면 맞춤하겠다 싶었다. 그러다 2월 중순이 지난 어느 날, 책 제목으로 삼으면 좋겠다 싶은 문장이 자꾸만 아른거린 탓에 그에게 연락해 의견을 물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그는 내가 내민 제목으로 바꾸어 보자고 제안에 응했다. 책의 제목이 갖는 힘이 이토록 대단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다. 지금의 제목으로 바꿔놓고 원고를 읽으니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 지금 여기는 분홍빛이 감도는구나. 흔들리며 피어있는 봄꽃처럼, “봉숭아 물빛으로 뺨을 붉히”듯이 분홍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닿았다. 자연스레, 꽃잎 주변으로 나날이 짙어가는 잎사귀의 초록으로 제목을 콕콕 찍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이어졌다. 흐드러지게 핀 꽃송이와 푸르른 나뭇잎 속에는, 그러니까 이 책 아래에는 우리네 삶을 받치고 있는 김현의 문장들이 촘촘하게 자리하고 있음이 다시금 내게 확신을 주었다.
어쩐지 그의 산문 끝에선 생동하는 기척이,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어딘가를 향해 가야 할 것 같은 기분,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 마치 만물이 생동하는 봄에 힘껏 봉오리를 틔우는 꽃송이 같달까. 그렇다면 그의 산문을 꽃받침이라 칭해도 되겠다. 한 장 한 장 책을 넘기다 보면 수북한 꽃받침이 쌓일 테고, 한아름 모아보면 방긋방긋 피어나는 꽃들이 아름다운 꽃다발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
아플 때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듯, “허전한 어른”이 아닌 “의젓한 어른”을 꿈꾸며 “상냥한 어린이의 세계”를 다시 만나고 싶거든 김현의 산문집을 펼치면 충분할 일. 낱장마다 천사의 날갯짓이 일어 우리들을 근사한 곳으로 안내할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에서 김현이 말하는 아름다운 일은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해봄 직한, 사람이기에 해야 할 것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잊지 않아야 할 중요한 것들 말이다. 너와 나, 우리를 잇는 일이 바로 그 아름다움에 다가서는 한 걸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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